층간소음의 범인은 윗집이 아니었다
천장과 바닥 사이에 있던 사람
층간소음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은 언제일까요.
새벽 두 시에 윗집에서 쿵쿵거릴 때일까요.
아이 뛰는 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질 때일까요.
아니면 잠들 만하면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릴 때일까요.
아닙니다.
정말 무서운 순간은 따로 있습니다.
윗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는데도 천장에서 소리가 날 때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무서운 순간이 있습니다.
그 소리를 나 혼자 듣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윗집도 듣고 있고, 아랫집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가 범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두 사람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다면요.
이건 귀신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귀신이라면 이사를 가면 끝날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사람은—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낼 수도 있습니다.
조용한 집
민우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프리랜서 개발자로 일했고, 일주일 중 대부분을 집에서 보냈다.
그래서 집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건도 단순했다.
역세권도 아니었다.
전망도 아니었다.
넓은 주방이나 커뮤니티 시설도 필요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조용한 집.
이전 집에서 층간소음 때문에 거의 신경쇠약 직전까지 갔기 때문이다.
밤 열두 시가 넘으면 위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새벽 한 시에는 누군가 발뒤꿈치로 바닥을 내리찍듯 걸어 다녔다.
주말 아침이면 아이가 뛰었다.
쿵.
쿵쿵.
드르륵.
처음에는 참았다.
그다음에는 관리실에 전화했다.
그다음에는 천장을 향해 휴대폰을 올려놓고 녹음하기 시작했다.
날짜와 시간까지 적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조차 천장을 바라보게 됐다.
층간소음에 시달려 본 사람만 아는 감각이 있다.
소리가 무서운 게 아니다.
다음 소리가 언제 날지 기다리게 되는 것.
그게 사람을 망가뜨린다.
그래서 새로 들어간 서울 외곽의 신축 오피스텔이 마음에 들었다.
복도에는 두꺼운 카펫이 깔려 있었고, 현관문도 묵직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진동조차 집 안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사는 집을 보여주며 말했다.
“여긴 층간소음 민원이 거의 없어요. 신축이라 바닥도 두껍고 방음도 잘돼 있습니다. 재택근무하시면 정말 편할 거예요.”
민우는 그 말을 믿었다.
200호.
방 하나와 작은 거실, 주방, 화장실.
혼자 살기에는 충분했다.
이사 첫날 밤.
민우는 자정이 조금 넘어 노트북을 닫았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집 안은 조용했다.
냉장고 컴프레서가 작게 웅웅거리는 소리.
화장실 환풍기가 멈추며 내는 낮은 진동.
멀리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그뿐이었다.
민우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골랐다.
그리고 불을 껐다.
스마트폰을 침대 옆에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잠이 들기 직전이었다.
드르륵.
민우가 눈을 떴다.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잘못 들었나 싶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드르륵.
이번에는 확실했다.
나무 의자를 아주 천천히 끄는 것 같은 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민우는 이전 집에서 층간소음을 수없이 들어봤다.
윗집에서 나는 소리는 대개 집 전체로 퍼졌다.
발소리는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였고, 의자를 끄는 소리는 콘크리트를 타고 둔탁하게 울렸다.
지금 들리는 소리는 달랐다.
너무 가까웠다.
천장 위가 아니라—
천장 안쪽에서 나는 것 같았다.
머리 위 얼마 되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손톱으로 석고보드를 긁는 느낌.
민우가 숨을 죽였다.
소리가 멈췄다.
한동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배관이겠지.’
신축 건물이 자리 잡으면서 나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민우는 몸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톡.
천장에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시.
톡.
잠시 뒤 한 번 더.
톡.
정확히 세 번이었다.
민우는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다 결국 스탠드를 켜 놓고 잠들었다.
이상한 규칙
다음 날에도 소리가 났다.
그다음 날도.
처음 며칠은 민우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건물 수축음.
환기 덕트 진동.
배관 압력 변화.
인터넷을 검색하면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얼마든지 나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소리가 나는 시각은 매일 달랐다.
밤 11시 40분일 때도 있었고,
새벽 1시 17분일 때도 있었다.
어떤 날은 새벽 세 시가 넘어서 시작됐다.
특정한 시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리가 시작되는 상황은 놀랄 만큼 일정했다.
민우가 일을 끝낸다.
샤워를 한다.
침대에 눕는다.
불을 끈다.
눈을 감는다.
그러면—
드르륵.
톡.
톡톡.
마치 누군가가 민우가 잠들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민우는 시험해 보기로 했다.
금요일 밤.
평소처럼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불을 끄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도 아무 소리가 없었다.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어 스탠드를 껐다.
눈을 감았다.
17분쯤 지났을 때였다.
드르륵.
민우가 눈을 떴다.
침대 옆 시계를 봤다.
불을 끈 뒤 17분.
첫날에도 거의 비슷한 시간이 흘렀다.
그날 처음으로 민우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윗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주일쯤 지나자 더는 참기 어려웠다.
민우는 관리실에 전화했다.
“200호인데요. 매일 밤 천장에서 소리가 납니다. 의자 끄는 소리도 나고, 두드리는 소리도 들려요.”
관리실 직원은 익숙하다는 듯 말했다.
“윗집에 먼저 전달해 보겠습니다.”
몇 시간 뒤 다시 전화가 왔다.
“200호 맞으시죠?”
“네.”
“300호 확인해 봤는데요. 어젯밤에는 집에 안 계셨답니다.”
민우는 헛웃음을 쳤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관리실 직원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300호 거주자분이 병원 간호사세요. 3교대 근무하시는 분인데 출입 기록도 확인했습니다. 어젯밤 10시 6분에 건물을 나가셨고 오늘 아침 7시 11분에 들어오셨어요.”
민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리가 났던 시간은 새벽 한 시가 넘어서였다.
그래도 쉽게 믿어지지는 않았다.
사람은 한번 범인을 정해 놓으면 이상해진다.
증거가 나와도 다른 이유를 찾는다.
가족이 있었겠지.
친구가 와 있었겠지.
출입 기록에 잡히지 않는 다른 방법이 있었겠지.
민우는 여전히 윗집을 의심했다.
그날 밤에도 소리가 났다.
드르륵.
민우는 이를 악물었다.
쿵.
쿵.
쿵.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다른 소리가 섞였다.
아주 작았다.
처음에는 환풍기에서 나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민우는 몸을 일으켰다.
숨을 죽였다.
천장 안쪽에서 누군가 숨을 섞어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자.”
민우의 손이 굳었다.
잠시 뒤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또렷했다.
“자.”
민우는 그날 아침까지 불을 끄지 못했다.
300호 여자
다음 날 밤 초인종이 울렸다.
민우가 문을 열자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서른 살쯤 되어 보였다.
머리는 대충 묶여 있었고, 눈 밑에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 특유의 짙은 그림자가 내려와 있었다.
300호에 사는 조은서였다.
은서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저기요.”
목소리가 떨렸다.
화가 난 사람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화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제발 그만하면 안 돼요?”
민우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은 제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뭘요?”
“매일 밤 위에서 소리 내잖아요.”
은서는 한동안 민우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피곤한 얼굴로 허탈하게 웃었다.
“저 야간 근무하는 날이 더 많아요.”
“관리실에서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그 소리는 뭡니까?”
은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가 말했다.
“나도 들어요.”
“뭘요?”
“소리요.”
은서가 발밑을 내려다봤다.
“나는 아래에서 들려요.”
민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신인 줄 알았어요. 밤마다 바닥 밑에서 누가 두드려요.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것처럼.”
은서가 손가락으로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톡.
톡톡.
민우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똑같았다.
“그리고…”
은서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뭐요?”
“화장실에서도 소리가 나요.”
“무슨 소리요?”
은서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말했다.
“남자 목소리요.”
민우가 굳었다.
“무슨 말을 하는데요?”
“제 이름을 불러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은서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조은서 씨.”
그리고 잠시 후.
“자요.”
민우는 입안이 바짝 말랐다.
어젯밤 자신이 들은 말과 같았다.
그때였다.
두 사람이 서 있던 복도 천장에서 소리가 났다.
툭.
둘 다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뒤.
툭.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웠다.
민우와 은서는 천천히 서로를 바라봤다.
둘 사이의 싸움이 끝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점검하러 온 남자
관리실에서는 하자보수 업체를 불러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그날 오후 한 남자가 민우의 집을 찾아왔다.
회색 작업복.
낡은 안전화.
목에는 플라스틱 출입증이 걸려 있었다.
출입증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박성진 / 시설협력
남자는 자신을 박 팀장이라고 소개했다.
말투는 친절했다.
“층간소음이라는 게 소리 자체보다 누가 낸 건지 모를 때 더 힘들어요.”
박 팀장은 천장을 한참 올려다봤다.
화장실 환풍구도 들여다보고, 벽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질문했다.
“혼자 사십니까?”
“네.”
“보통 몇 시쯤 주무세요?”
“일이 늦게 끝나서 새벽 한두 시쯤요.”
“재택근무하시죠?”
민우가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네.”
“컴퓨터는 거실에서 쓰시고요?”
박 팀장의 시선이 노트북이 놓인 책상으로 향했다.
“그런 것까지 필요한가요?”
“생활 소음 발생 위치 보려고 그러는 겁니다.”
설명을 듣고 나니 그럴듯했다.
민우는 더 의심하지 않았다.
점검을 마친 박 팀장은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말했다.
“신축 건물에도 빈 공간은 있습니다.”
“빈 공간이요?”
“배관이나 환기 덕트, 전선 지나가는 공용 설비 공간이요.”
민우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박 팀장이 웃었다.
“사람이 들어가서 살고 그런 공간은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상하게도,
민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불안해졌다.
혼자 산다고
그날 밤 민우는 불을 끄지 않았다.
침실 스탠드를 켜 두고 소형 녹음기를 침대 옆에 놓았다.
시간이 흘렀다.
새벽 한 시.
두 시.
아무 일도 없었다.
2시 40분쯤.
화장실 쪽에서 소리가 났다.
드르륵.
민우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천장이 아니었다.
환풍구 안쪽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사각.
사각.
누군가 옷을 콘크리트에 끌며 기어가는 것 같은 소리.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산다고.”
민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 말은 오늘 처음 집에 왔던 박 팀장에게만 했다.
민우는 즉시 은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점검 기사 왔어요?’
10초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네.’
‘박 팀장이라는 사람?’
‘맞아요.’
민우가 다시 물었다.
‘그 사람한테 근무시간 이야기했어요?’
조금 뒤 답장이 왔다.
‘네. 야간근무 많다고 했어요.’
그리고 20초쯤 뒤,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잠깐만요.’
민우가 곧바로 답했다.
‘왜요?’
이번에는 답장이 한동안 오지 않았다.
1분.
2분.
그리고—
‘방금 바닥 아래에서 남자 목소리가 났어요.’
민우는 휴대폰 화면만 바라봤다.
곧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일은 데이.’
내일 은서는 낮 근무였다.
그 사실 역시,
그날 박 팀장에게 말했다고 했다.
두 집 사이
그날부터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윗집도 아니다.
아랫집도 아니다.
배관 소리도 아니다.
누군가가 두 집의 생활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소리를 이용해 두 사람을 자극하고 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였다.
민우가 천장에서 듣는 목소리.
은서가 바닥에서 듣는 목소리.
방향은 정확히 반대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두 집 사이.
하지만 사람이 그곳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둘은 증거를 만들기로 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간,
두 집을 모두 비우기로 했다.
그리고 양쪽 집에 녹음 장치와 홈캠을 켜 두었다.
새벽 2시 30분.
민우가 200호에서 나왔다.
은서도 300호에서 내려왔다.
두 사람은 건물 맞은편 24시간 편의점 창가에 앉았다.
서로가 집 밖에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2시 57분.
민우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홈캠 앱 알림이었다.
실내 소음 감지.
거의 동시에 은서의 휴대폰에도 알림이 떴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화면을 바라봤다.
둘 다 집 밖에 있었다.
그런데 두 집 안에서 동시에 소리가 감지되고 있었다.
민우가 이어폰을 꽂았다.
200호 실시간 음성이 들렸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리고—
쿵.
쿵.
쿵.
민우의 손이 떨렸다.
천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곧이어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앉아 있네.”
민우는 그대로 굳었다.
자신과 은서가 집 밖에서 서로를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들렸다.
은서도 자신의 녹음을 확인했다.
300호에서는 같은 두드림이 바닥 아래에서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녹음 마지막에 아주 작은 남자 목소리가 담겼다.
“같이 있네.”
그 순간 두 사람은 처음으로 확신했다.
그 사람은 소리만 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보고 있었다.
도면 속 빈 공간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관리실과 경찰에 연락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층간소음 신고는 흔했다.
공동주택에서는 소리가 기둥과 배관을 타고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들리는 경우도 있었다.
녹음만으로 발생 위치를 특정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민우와 은서의 녹음 파일을 같은 시각에 맞춰 재생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간격.
비슷한 목소리.
200호에서는 천장.
300호에서는 바닥.
시설 관리자가 건물 도면을 가져왔다.
도면을 보던 직원의 손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잠깐만요.”
화면을 확대했다.
“여기 설비 공간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생활하는 층은 아니었다.
200호 천장과 300호 바닥 사이 일부 구간에 환기 덕트와 배관, 전선이 지나가는 공용 점검 공간이 있었다.
높이는 매우 낮았다.
서서 걸어 다닐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작업자가 몸을 낮추고 기어 들어가는 것은 가능했다.
출입구는 주민 세대 안이 아니었다.
공용 복도 끝 잠긴 설비실 안쪽에 있었다.
경찰과 시설 관리자는 그날 새벽 점검구를 열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오래 갇혀 있던 공기가 밀려 나왔다.
콘크리트 먼지 냄새.
습기 냄새.
오래된 종이 냄새.
그리고 이상하게—
컵라면 국물 냄새가 섞여 있었다.
경찰 한 명이 손전등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높이가 낮아 허리를 펼 수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뭐 있습니다.”
노트
설비 공간 안에는 사람이 머문 흔적이 있었다.
눌린 먼지.
무릎 자국.
손바닥 자국.
작업화 밑창 자국.
배관과 덕트 사이 조금 넓은 곳에는 얇은 방석까지 깔려 있었다.
그 옆에는 빈 생수병과 삼각김밥 포장지, 보조배터리, 작은 녹음기와 이어폰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두꺼운 검은색 노트 한 권.
경찰이 첫 장을 펼쳤다.
호수가 적혀 있었다.
200호.
300호.
402호.
502호.
703호.
803호.
여러 호수 옆에는 날짜와 짧은 메모가 빼곡했다.
그중에서도 200호와 300호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았다.
경찰이 페이지를 넘겼다.
민우는 옆에서 글을 읽었다.
200호 남성. 재택근무. 잠에 민감.
다음 줄.
불 끈 뒤 평균 18분.
민우는 순간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18분.
첫날 밤,
불을 끄고 처음 소리가 들렸던 시간과 거의 같았다.
또 다른 기록.
300호 여성. 병원 근무. 수면 부족. 남자 목소리에 반응 큼.
다음 페이지.
양쪽 모두 서로를 먼저 의심함.
또 다음.
직접 만나게 하면 안 됨.
만나면 의심이 약해짐.
그리고—
화해 기미. 다시 갈라놓을 것.
민우는 더 이상 페이지를 쉽게 넘길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단순히 그곳에 숨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잘 곳이 없어서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물건을 훔치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언제 집에 들어오는지.
언제 불을 끄는지.
어떤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몇 번 두드리면 관리실에 연락하는지.
윗집과 아랫집이 언제부터 서로를 의심하는지.
얼마나 자주 싸우는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상대를 범인이라고 확신하게 되는지.
노트 뒤쪽의 한 페이지에는 다른 기록보다 훨씬 굵은 글씨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둘이 같이 위를 보면 끝이다.
박 팀장
경찰은 출입 기록을 다시 확인했다.
소음이 녹음된 날 새벽 2시 41분.
공용 설비실 앞에서 출입 기록이 하나 남아 있었다.
사용된 카드는 시설 협력업체 출입증.
카드 번호 P-17.
관리실 직원이 모니터를 한참 들여다보다 말했다.
마지막 등록 사용자 이름.
박성진.
민우와 은서의 집을 점검했던 박 팀장이었다.
업체에 바로 연락했다.
그런데 업체 직원의 대답은 이상했다.
“박성진이요?”
“네. 오늘 이 건물에 점검하러 왔던 분입니다.”
잠시 침묵.
“오늘요?”
“네.”
“그럴 리가 없는데요.”
“왜요?”
상대방이 말했다.
“박성진 씨 한 달 전에 퇴사했습니다.”
관리실 직원의 얼굴이 굳었다.
“출입증은요?”
“반납 처리돼 있습니다.”
퇴사한 직원.
반납된 출입증.
그런데 그 카드는 계속 건물의 문을 열고 있었다.
CCTV를 확인했다.
회색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찍혀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채 정문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한 건 행동이었다.
몰래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경비실 앞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엘리베이터에서 주민을 만나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손에는 공구 가방까지 들려 있었다.
누가 봐도 건물 점검 직원이었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사람들은 어두운 복도에 숨어 있는 낯선 남자를 보면 경계한다.
하지만 작업복을 입고,
출입증을 목에 걸고,
공구 가방을 들고,
“점검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잘 의심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사람이 찾아낸 가장 완벽한 은신처는 설비 공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신뢰 속에 숨어 있는 것.
그게 진짜 은신처였을지 모른다.
무단 출입자
결국 민우와 은서는 둘 다 이사를 결정했다.
관리사무소는 설비 공간의 점검구를 보강하고 출입 권한을 전면 교체했다고 밝혔다.
며칠 뒤 엘리베이터 안에 공지가 붙었다.
내용은 짧았다.
일부 공용 설비 구역에서 무단 출입 흔적이 발견되어 보안을 강화하였습니다.
민우는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무단 출입자.’
이상한 표현이었다.
정말 단순한 외부인이었을까.
그 사람은 일반 주민보다 이 건물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복도에 CCTV 사각이 있는지.
점검구가 어디 있는지.
어떤 카드가 어떤 문을 여는지.
배관과 덕트가 어느 세대로 이어지는지.
누가 혼자 사는지.
누가 밤에 집을 비우는지.
누가 잠에 민감한지.
하지만 공지 어디에도 이런 문장은 없었다.
용의자를 검거했습니다.
박성진은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사용하던 출입카드도 찾지 못했다.
설비 공간에서 발견된 노트와 녹음 장치는 경찰이 가져갔다.
서류상으로는 그렇게 사건이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민우도 처음에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 일이 하나 남아 있었다.
이사 전날 밤
이사 전날.
집 안에는 포장 상자가 쌓여 있었다.
침대도 이미 분해해 놓은 상태라 민우는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아 두었다.
자정이 조금 지났다.
그동안 그렇게 두려워했던 천장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민우는 마지막 상자에 테이프를 붙였다.
그때였다.
드르륵.
민우의 손이 멈췄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위가 아니었다.
현관문 밖.
복도에서 뭔가를 천천히 끄는 소리였다.
드르륵.
민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조심스럽게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투시창에 눈을 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앞도 비어 있었다.
비상계단 문도 닫혀 있었다.
그런데 현관 앞 바닥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하얀 봉투 하나.
민우는 한참 동안 문을 열지 못했다.
경찰에 연락할까 생각했다.
그러다 다음 날이면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문고리를 잡았다.
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복도는 조용했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민우는 봉투를 집어 들고 곧바로 문을 닫아 잠갔다.
봉투 안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었다.
새것처럼 보이는 귀마개 한 쌍.
그리고 반으로 접힌 종이 한 장.
민우는 한동안 종이를 펴지 못했다.
손끝이 떨렸다.
마침내 종이를 펼쳤다.
글은 길지 않았다.
딱 한 줄이었다.
다음 집은 누구랑 싸우게 할까.
민우는 그날 밤 짐을 모두 싸지 못했다.
노트북과 휴대폰, 지갑만 챙겼다.
그리고 집을 나왔다.
다시는 200호에서 자지 않았다.
민우와 은서는 처음에 서로를 의심했습니다.
민우는 윗집 사람이 거짓말한다고 생각했고,
은서는 아랫집 남자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믿었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화를 냈고,
서로를 범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간 동안 진짜 범인은 가장 안전했습니다.
두 사람이 자신을 찾는 대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비 공간에서 발견된 노트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둘이 같이 위를 보면 끝이다.
생각해 보면 그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경찰이 오는 순간도,
CCTV에 얼굴이 찍히는 순간도 아니었을 겁니다.
민우와 은서가 서로를 의심하는 것을 멈추고,
같은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이었을 겁니다.
공동주택에서 들리는 소리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배관을 타기도 하고,
벽과 기둥을 통해 전혀 다른 위치에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천장에서 소리가 난다고 해서 언제나 윗집이 원인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윗집에 아무도 없는데도 같은 소리가 반복되고,
당신이 불을 끄는 순간을 알고 있는 것처럼 소리가 시작되고,
어느 날 그 소리가 당신의 생활까지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때는 천장만 바라보지 마세요.
누군가 당신과 다른 사람을 서로 바라보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먼저 확인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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