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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공포 이야기와 인생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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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파일 고스트 아카이브공포 괴담

수원역에서 나를 한 달 동안 기다린 사람들

By seoulaura
9월 25, 2026 12 Min Read
0

지금도 길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면 저는 걸음을 멈춥니다.

“인상이 참 선해 보여요.”

별것 아닌 말입니다.

칭찬처럼 들릴 수도 있고, 흔한 종교 권유의 첫마디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들으면 상대의 얼굴보다 먼저 손을 봅니다.

그 사람이 혼자인지도 확인합니다.

그리고 아주 짧게라도 뒤를 돌아봅니다.

혹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다른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지는 않은지.

왜냐하면 저는 그 말을 들은 뒤 한 달쯤 지나,

처음 보는 노인을 도와주려다가 어느 낡은 집 안에 갇혔고,

그곳에서 거의 돌아오지 못할 뻔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날 갑자기 잘못된 사람을 만난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디에서 버스를 기다리는지,

언제 혼자가 되는지,

누군가 도움을 청하면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날의 시작은 낡은 골목도,

초록색 대문도,

장갑을 빌려달라던 할머니도 아니었습니다.

한 달 전.

사람들로 가득한 역 앞에서

한 여자가 저를 바라보며 했던 말.

그 순간부터였는지도 모릅니다.

“잠깐 보고 있었는데요.”

겨울의 역 앞

그해 겨울 저는 회사 기숙사에서 지냈습니다.

출퇴근은 회사 통근버스를 이용했습니다.

버스를 타는 곳은 수원역에서 큰길 하나를 건넌 뒤 나오는 상가 앞이었습니다.

낮에는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버스가 계속 들어왔고,

택시가 줄지어 섰으며,

퇴근 시간이면 검은 롱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많다는 건,

어쩐지 안전하다는 뜻처럼 느껴지니까요.

문제는 회사 버스 배차 간격이 길었다는 겁니다.

한 대를 놓치면 꽤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날도 제가 횡단보도에 도착하기 직전에 버스가 떠났습니다.

멀어지는 붉은 후미등을 한참 보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몹시 찼습니다.

입김이 얼굴 앞에서 금방 흩어졌고,

장갑 안의 손가락까지 시렸습니다.

저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 다음 버스를 기다리려고 몸을 돌렸습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불렀습니다.

“저기요.”

처음에는 남자인 줄 알았습니다.

짧은 머리.

어두운 외투.

목소리도 낮은 편이었습니다.

돌아보니 여자였습니다.

스물 후반인지 서른 중반인지 알기 어려운 얼굴.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특징도 없었습니다.

그게 오히려 나중에는 더 무서웠습니다.

어디에서 다시 마주쳐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할 것 같은 얼굴.

여자는 저를 보며 웃었습니다.

“아까부터 잠깐 보고 있었는데.”

그리고 제 얼굴을 천천히 보았습니다.

“인상이 참 선해 보여요.”

저는 웃었습니다.

조금 어이없어서였습니다.

그날 화장을 꽤 진하게 한 상태였고,

회사에서 하루 종일 시달린 탓에 표정도 썩 좋지 않았습니다.

선해 보인다는 말이 제 얼굴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요?”

“네. 되게 착하게 생겼어요.”

그다음부터 질문이 시작됐습니다.

“학생이에요?”

“아니요.”

“학생 아닌데 어려 보이네. 스물 몇 살?”

저는 정확한 나이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시선이 잠깐 제 어깨 너머로 향했습니다.

버스가 들어오는 쪽이었습니다.

“여기서 회사 버스 기다리죠?”

순간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뿐이었습니다.

이 근처에서 늘 같은 사람들이 통근버스를 기다리니 알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는 다시 웃었습니다.

“좋은 일 많이 하고 살아요.”

운이 어떻고,

사람에게는 기운이 있고,

착한 사람은 결국 좋은 걸 돌려받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조금 더 했습니다.

저는 흔한 포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연락처를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어디로 따라오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말했습니다.

“그럼 조심해서 가요.”

그리고 돌아섰습니다.

잠시 후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말을 걸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을 놓았습니다.

‘원래 아무한테나 저러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저는 그 일을 잊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누군가가 아무 질문이나 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질문의 목적이 대화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확인일 수도 있다는 걸.

한 달 뒤

12월의 어느 일요일이었습니다.

전날 눈이 내렸습니다.

차가 밟고 지나간 눈은 길 가장자리에서 검게 얼어붙어 있었고,

보도블록에는 얇은 얼음이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본가에 다녀와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평소처럼 역 근처에서 회사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왔습니다.

지금도 첫인상은 아주 선명합니다.

너무 초라했습니다.

겨울 한복판인데 옷은 지나치게 얇았습니다.

얼굴 아래에는 오래된 천 같은 것을 두르고 있었고,

몸에도 여러 겹의 낡은 헝겊을 감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치마 아래로 드러난 발목은 앙상했습니다.

양말도 없이 낡은 고무신 같은 것을 신고 있었습니다.

손은 새빨갰습니다.

추위에 오래 노출된 손처럼 부어 있었습니다.

등에는 큰 배낭을 메고 있었고,

바닥에는 보자기로 싼 커다란 짐이 세 덩이나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이고, 아가씨.”

손끝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손이 너무 시린데 장갑 좀 빌려줄래?”

그 순간 저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위험하다는 생각보다

‘너무 춥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제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드렸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보여 목도리까지 풀었습니다.

“이것도 하세요.”

할머니가 제 얼굴을 올려다봤습니다.

“아이고, 착하기도 하지.”

착하다.

한 달 전 들었던 말과 같은 종류의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어디 가세요?”

할머니는 잠시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아들.”

“네?”

“아들 찾으러 가.”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반복했습니다.

“아들 찾아야 해. 아들…”

치매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서 이 사람은 완전히 분류됐습니다.

도와줘야 하는 사람.

이렇게 한번 분류하고 나니,

그다음부터 보이는 이상한 점들은 전부 다른 식으로 해석됐습니다.

“짐 무거우시면 제가 좀 들어드릴까요?”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보따리 하나를 제 쪽으로 밀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너무 가벼웠습니다.

겉보기에는 두 팔로 안아야 할 만큼 컸습니다.

그런데 무게는 거의 없었습니다.

솜이나 빈 옷가지가 들어 있는 것처럼 가벼웠습니다.

저는 그때도 이유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불인가 보다.’

그게 첫 번째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도망칠 수 있었던 순간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상한 것을 이상하지 않은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골목 안으로

할머니는 상가 옆의 좁은 길로 들어갔습니다.

저도 짐을 들고 따라갔습니다.

처음에는 큰길의 소음이 들렸습니다.

버스 브레이크 소리.

택시 경적.

사람들 목소리.

하지만 골목을 하나 돌고,

다시 하나를 돌자,

그 소리들이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대신 제 구두가 얼어붙은 바닥을 밟는 소리만 크게 들렸습니다.

딱.

딱.

딱.

할머니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건 걸음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허리가 심하게 굽어 있었습니다.

역 앞에서는 걷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골목에 들어오자 이상하리만큼 빨랐습니다.

저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바닥을 보며 걸었는데,

잠깐 고개를 들 때마다 할머니가 생각보다 멀리 앞서 있었습니다.

“할머니, 천천히 가세요.”

대답이 없었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낡은 셔터가 내려간 가게.

주인이 떠난 듯 먼지가 낀 창문.

간판만 남고 내부는 텅 빈 상점.

낮인데도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골목.

처음 보는 곳이었습니다.

수원역 근처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그제야 불안해졌습니다.

저는 뒤를 돌아봤습니다.

어느 길로 들어왔는지 순간 헷갈렸습니다.

앞서 가던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조금만 가면 돼.”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겠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제가 멈출까 봐 안심시키는 사람처럼 말했습니다.

“조금만 가면 돼.”

그때 돌아갔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했습니다.

설마.

늙은 할머니인데.

사람은 위험 앞에서 항상 비명을 지르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자신을 설득합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내가 너무 예민한 거겠지.

그렇게 몇 번의 ‘설마’를 지나고 나면

이미 돌아가는 길을 모르는 곳에 서 있게 됩니다.

초록색 대문

할머니가 어느 낡은 주택 앞에서 멈췄습니다.

대문은 짙은 초록색이었습니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아래쪽에는 녹이 번져 있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안도했습니다.

도착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짐을 내려놓았습니다.

“할머니, 그럼 저 갈게요.”

그 순간,

할머니가 제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차 한잔하고 가.”

“아니에요. 버스 타야 돼요.”

“여기까지 왔는데.”

저는 웃으며 손을 떼려고 했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제 팔을 잡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습니다.

손이 너무 셌습니다.

추위에 떨던 사람의 손이 아니었습니다.

아까 장갑조차 제대로 끼기 힘들어 보였던 손이 제 손목을 단단히 감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저 진짜 가야 돼요.”

초록색 대문이 열렸습니다.

할머니가 저를 끌어당겼습니다.

저는 완전히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너무 빨리 바뀌면

사람은 자신이 지금 뭘 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데 몇 초가 걸립니다.

그 몇 초 동안 저는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작은 마당이 있었습니다.

낡은 마루.

닫힌 방문.

안쪽으로 이어지는 부엌.

할머니는 저를 마루 같은 곳에 앉혔습니다.

“있어.”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그제야 주변을 제대로 봤습니다.

그 순간,

맞은편 방문이 아주 조금 열렸습니다.

검은 틈.

그리고 그 틈 사이에

사람의 눈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저와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탁.

문이 닫혔습니다.

그 작은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들렸습니다.

그 순간 몸속 어딘가에서 아주 명확한 신호가 올라왔습니다.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나가.

저는 바로 일어섰습니다.

“할머니, 저 갈게요.”

부엌 안에서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뛰어나왔습니다.

뛰었습니다.

분명히.

역 앞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사람이.

“왜 가?”

목소리도 달라져 있었습니다.

가늘고 떨리던 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대문 쪽으로 걸었습니다.

“약속이 있어요.”

“차 마시고 가.”

“괜찮아요.”

제 걸음이 빨라졌습니다.

그때 대문이 열렸습니다.

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앞에 있던 여자 얼굴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습니다.

짧은 머리.

낮은 목소리.

한 달 전 역 앞에서 저를 바라보던 여자.

“인상이 참 선해 보여요.”

그 여자였습니다.

뒤에는 마흔 전후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여자는 저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다리던 사람이 제시간에 도착한 것처럼 웃었습니다.

“어?”

고개를 살짝 기울였습니다.

“어디 그렇게 급하게 가요?”

그 한마디에

지난 한 달이 전부 다른 모양으로 바뀌었습니다.

우연히 말을 건 게 아니라면.

오늘 할머니가 우연히 나를 만난 게 아니라면.

그러면—

이 사람들은 내가 여기 올 걸 알고 있었던 건가.

여자가 제 어깨를 밀었습니다.

할머니가 다시 팔을 잡았습니다.

남자는 대문 앞을 막았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제가 들어온 건 집이 아니라

출구가 하나뿐인 공간이었습니다.

세 잔의 커피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과

지금 움직이면 바로 붙잡힐 거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저는 다시 앉았습니다.

겁먹지 않은 척했습니다.

아직은 상황을 오해한 사람처럼 보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가 제 맞은편에 앉았습니다.

남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습니다.

아까 눈이 보였던 방문은 다시 아주 조금 열려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여전히 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뒤 쟁반을 들고 나왔습니다.

커피가 세 잔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것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두 개는 찻잔이었습니다.

하나는 종이컵.

제 것만 종이컵이었습니다.

할머니가 그것을 제 앞에 놓았습니다.

“마셔.”

저는 컵을 들었습니다.

따뜻했습니다.

평범한 인스턴트커피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에 댈 수가 없었습니다.

근거는 없었습니다.

다만 몸이 거부했습니다.

여자는 다시 말을 시작했습니다.

우주.

기운.

만상.

운명.

선택받은 사람.

말은 계속 이어졌지만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 머릿속에서는 다른 계산만 돌아갔습니다.

대문까지 몇 걸음.

할머니의 위치.

남자가 제게 닿는 데 걸리는 시간.

여자가 몸을 일으킬 방향.

창문은 잠겨 있는가.

마당에는 올라갈 만한 것이 있는가.

여자가 제 손에 든 컵을 봤습니다.

“왜 안 마셔요?”

“뜨거워서요.”

“안 뜨거운데.”

여자의 미소가 아주 잠깐 사라졌습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웃었습니다.

“맛있어요.”

저는 컵 가장자리를 입술에 댔습니다.

마시는 척했습니다.

혀에는 한 방울도 닿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계속 말했습니다.

남자는 옆에서 책 같은 것을 펼쳤습니다.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여자의 몸은 조금 앞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졌습니다.

지금.

지금 아니면 못 나간다.

저는 그대로 다리를 들었습니다.

여자의 가슴 쪽을 힘껏 밀어찼습니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는 들고 있던 커피를 그대로 그의 얼굴 쪽으로 뿌렸습니다.

남자가 욕을 했습니다.

저는 대문으로 뛰었습니다.

손잡이를 잡아당겼습니다.

안 열렸습니다.

다시.

안 열렸습니다.

아래를 보니 빗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손가락이 떨렸습니다.

철제 걸쇠를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찰칵.

찰칵.

등 뒤에서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

여자의 욕설.

남자의 발소리.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대문을 포기했습니다.

마당으로 뛰었습니다.

담장

구석에 낡은 개집과 상자, 플라스틱 통이 쌓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밟았습니다.

무언가가 무너졌습니다.

뒤에서 남자가 소리쳤습니다.

“잡아!”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

여자.

혹은 아직 방 안에 있던 사람.

그제야 집 안에 몇 명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담장을 붙잡았습니다.

손이 미끄러졌습니다.

다시 올라갔습니다.

구두 한 짝이 벗겨졌습니다.

담장 위에 몸을 걸친 순간 뒤를 봤습니다.

남자가 바로 아래까지 와 있었습니다.

그 얼굴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무표정하게 앉아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면 안 되는 것을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몸을 반대편으로 던졌습니다.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무릎과 발목에 엄청난 충격이 왔습니다.

하지만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담장 위로 남자의 손이 올라왔습니다.

저는 무작정 그 손을 밟았습니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발밑에 돌이 있었습니다.

주워서 던졌습니다.

어디에 맞았는지는 모릅니다.

저는 뛰었습니다.

뒤에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쾅.

누군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뒤를 보지 마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냥 뛰었습니다.

골목을 하나 돌았습니다.

또 하나.

폐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습니다.

입 안에서 피 맛 같은 것이 났습니다.

구두가 방해돼 나머지 한 짝도 벗어던졌습니다.

스타킹만 신은 발로 눈 녹은 바닥을 밟았습니다.

유리인지 돌인지 모를 것이 발바닥을 찔렀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뒤를 봤습니다.

남자가 보였습니다.

멀지 않았습니다.

저는 눈앞의 첫 건물로 들어갔습니다.

오래된 상가 건물이었습니다.

계단을 뛰어올라갔습니다.

중간층의 창문으로 골목을 봤습니다.

남자가 주변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잠시 뒤 그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향에서

그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여자는 맞은편 건물 문을 잡아당겼습니다.

잠겨 있었습니다.

몇 번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섰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제가 숨어 있는 건물을 바라봤습니다.

그 순간,

저는 창문에서 몸을 떼었습니다.

아래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계단을 올랐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신발이 없어서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아래에서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또각.

또각.

한 층.

또각.

조금 더 가까이.

또각.

저는 옥상까지 올라갔습니다.

끝이었습니다.

더 이상 위층은 없었습니다.

보라색 고무대야

옥상문을 열었습니다.

끼익.

낡은 철문의 소리가 밤공기를 찢는 것처럼 크게 났습니다.

저는 그 소리 때문에 제가 어디 있는지 전부 들킨 것 같았습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습니다.

옆 건물 옥상이 보였습니다.

순간 정말 뛰어내릴까 생각했습니다.

떨어져 다치더라도

붙잡히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포가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이는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때 옥상 한쪽에 놓인 커다란 플라스틱 통들이 보였습니다.

김장할 때 쓰는 것처럼 생긴 보라색 고무대야 여러 개.

저는 가장 큰 것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몸을 구겨 넣었습니다.

무릎이 턱에 닿았습니다.

옆에 작은 흰색 대야 하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까지 끌어당겼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작은 대야를 머리 위에 세웠습니다.

밖에서 큰 통을 열어도

안이 다른 물건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리고 뚜껑을 덮었습니다.

세상이 사라졌습니다.

완전히 깜깜했습니다.

고무 냄새.

쉰 김치 냄새.

오래 고인 물 냄새.

숨을 들이쉴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기침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습니다.

쿵.

쿵.

쿵.

내 몸 안의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시끄러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습니다.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또각.

또각.

멈췄습니다.

아무 소리도 없었습니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습니다.

혹시 문 앞에서 듣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숨소리를.

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그때 옥상문이 열렸습니다.

끼이익.

바람 소리.

발소리.

아주 천천히 가까워졌습니다.

저는 숨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빛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들어 있던 대야의 뚜껑이 열렸습니다.

그 몇 초는 지금도 기억이 느리게 재생됩니다.

차가운 공기.

위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

누군가 바로 머리 위에 있다는 사실.

작은 흰 대야가 제 얼굴과 머리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몇 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탁.

뚜껑이 닫혔습니다.

그 순간 울음이 터질 뻔했습니다.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곧 옆쪽에서 다른 뚜껑을 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탁.

다시 닫힘.

또 다른 통.

탁.

하나씩 열어보고 있었습니다.

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들어 있던 통도

이미 한번 열어봤습니다.

작은 흰 대야 하나 때문에

그 사람은 안을 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손끝이 차가워집니다.

20분

발소리가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나오지 못했습니다.

간 척하고 있는 거라면.

옥상문 뒤에 서 있다면.

제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면.

한참 웅크리고 있다가

그제야 휴대폰 생각이 났습니다.

주머니 안에 있었습니다.

왜 이전에는 떠올리지 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공포 속에서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데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된 생각부터 하나씩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전화를 걸면 목소리가 새어 나갈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문자로 신고했습니다.

손가락이 너무 떨려 오타가 계속 났습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전화하지 말아 주세요.

누가 저를 쫓아와요.

납치당할 뻔했어요.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옥상에 숨어 있어요.

그 안에서 저는 적어도 한두 시간은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약 20분이었다고 했습니다.

겨우 20분.

공포 속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늘어납니다.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

바깥에서 갑자기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발소리.

무전기 소리.

그리고 누군가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씨!”

저는 오히려 더 작게 웅크렸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미 제 이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또 속이는 거라면.

경찰인 척하는 거라면.

“○○씨! 경찰입니다!”

그래도 바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잠시 뒤 아주 조심스럽게 뚜껑을 밀었습니다.

몇 센티미터.

틈 사이로 밖을 봤습니다.

제복이 보였습니다.

무전기.

119 구조대원.

그제야 뚜껑을 밀어냈습니다.

“살려주세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했습니다.

“살려주세요.”

그리고 울었습니다.

밖으로 나와서야 제 발이 보였습니다.

스타킹은 찢겨 있었습니다.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발바닥에는 작은 상처가 여러 개 나 있었고,

발목은 눈에 띄게 부어 있었습니다.

도망칠 때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안전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온몸이 한꺼번에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무서웠던 말

얼마 뒤,

제가 도망쳐 나온 집과 관련된 사람들이 경찰 조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주술적인 말을 이용해 사람에게 접근하고,

취약한 사람을 붙잡아 금전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정황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약물을 이용했다는 주장과

다른 피해를 둘러싼 이야기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세세한 내용보다

경찰에게 들었던 한 가지 말 때문에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처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건

할머니를 만난 날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한 달 전.

역 앞에서 짧은 머리의 여자가 말을 걸었던 날.

그때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 여자는 저와 친해지려고 말을 건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있었던 겁니다.

혼자인가.

직장인인가.

이곳에 정기적으로 오는가.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바로 도망가는가.

아니면 몇 마디 정도는 예의상 들어주는가.

특히—

누군가를 쉽게 불쌍히 여기는 사람인가.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억 속의 장면들이 전부 다시 배열됐습니다.

지나치게 가벼웠던 짐.

골목에 들어서자 갑자기 빨라졌던 할머니.

제가 돌아가겠다고도 하지 않았는데

“조금만 가면 돼.”

라고 했던 말.

얼어붙은 손처럼 보였는데

제 팔을 놓아주지 않던 힘.

대문 앞에서 저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던 여자.

그리고 커피 세 잔.

두 개의 찻잔.

하나의 종이컵.

그제야 알았습니다.

저는 그날 갑자기 위험에 빠진 게 아니었습니다.

그날 처음 표적이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달 전부터

조금씩 그 집을 향해 걷고 있었습니다.

저만 몰랐을 뿐입니다.

사건 이후 한동안 사람 많은 역에서도 혼자 있지 못했습니다.

낯선 사람이 가까이 오면 이유 없이 심장이 빨라졌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노인을 보면

예전처럼 바로 다가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먼저 주변을 봤습니다.

다른 사람이 함께 있는지.

골목으로 따라가야 하는지.

내가 돌아올 수 있는 장소인지.

그리고 그런 제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날 그 사람들이 가져간 건

가방도,

휴대폰도,

돈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다른 것이었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었던 마음.

곤란해 보이는 사람을 보고

한번쯤 도와주고 싶어 했던 마음.

그 뒤로 그 마음에는 언제나 의심 하나가 따라붙게 됐습니다.

혹시 이것도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건 아닐까.

가끔 겨울이 되면

아직도 그날 역 앞이 떠오릅니다.

차가운 바람.

놓쳐버린 통근버스.

사람들 사이에 혼자 서 있던 저.

그리고 군중 속에서 천천히 제 쪽으로 걸어오던 짧은 머리 여자.

여자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잠깐 보고 있었는데, 인상이 참 선해 보여요.”

그때 저는

‘선해 보인다’는 말만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문장에서 정말 무서웠던 부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잠깐 보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이미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모르는 동안,

누군가는 제가 다시 혼자가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 대하여

이 작품은 온라인상에 공유된 여러 경험담과 도시괴담, 현실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창작적으로 각색·재구성한 현실공포 픽션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나이, 직업, 구체적인 장소·상호·시간·동선 및 사건의 세부 내용은 이야기적 완성도와 개인 식별 방지를 위해 변경·통합·재구성되었습니다. 특정 개인, 단체, 사업자, 종교 또는 실제 사건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사실관계를 단정하려는 목적이 없으며, 작품 속 인물과 상황은 실제 대상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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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a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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