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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공포 이야기와 인생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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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인생 사연

내 이름으로 남은 날

By seoulaura
9월 20, 2026 13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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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보내고 돌아온 다음 날, 김순자는 싱크대에 쌓인 종이컵을 씻고 있었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도 집에는 씻을 것이 남았다. 손님들이 마시다 놓고 간 컵마다 커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순자는 수도꼭지를 틀어 컵을 하나씩 헹궜다. 물이 손등에 닿는 감각만 또렷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오전 열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현관문 밖에는 검은 코트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쉰 살은 넘어 보였다. 여자는 낡은 갈색 봉투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순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도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김순자 선생님이시죠?”

“그런데요.”

여자의 손가락이 봉투 가장자리를 구겼다.

“저는 선생님 남편분께…… 서른 해 넘도록 매달 돈을 받았습니다.”

순자는 문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손바닥 안에서 금속이 서서히 미끄러졌다. 남편의 관이 닫힌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미처 울지 못한 울음이 집 안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앞에 먼저 다른 감정이 와 서 있었다.

순자는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왜 이제 왔느냐고, 남편과 무슨 사이였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는 사진이나 편지 대신 봉투에서 통장 사본을 꺼냈다. 맨 앞장에 남편의 이름, 마지막 장에 1억 8천4백만 원이라는 잔액이 찍혀 있었다. 표지 안쪽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순자.

그 아래에 짧은 문장이 있었다.

‘순자 씨가 우리 집에서 일한 마흔여섯 해의 월급.’

순자는 그 글씨를 알아보았다. 남편 박정호가 늘 장보기 목록이나 공과금 봉투에 쓰던 글씨였다. 낯선 여자의 얼굴보다 그 친숙한 글씨가 더 낯설었다.

그날 아침, 순자는 남편의 영정사진을 식탁 한쪽에 놓아두었다. 거실의 정해진 자리에 모셔두기에는 아직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익숙하지 않았다. 눈을 돌리면 사진 속 남편이 보였고, 다시 컵을 헹구었다. 조문객들이 벗어놓은 일회용 슬리퍼는 현관에 몇 켤레 남아 있었다. 집안은 손님들이 남긴 흔적을 미처 치우지 못해 어수선했다.

순자는 슬리퍼를 신발장 아래로 밀어 넣고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주웠다. 슬픔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것은 오래된 버릇이었다. 아이가 열이 날 때도 아침밥을 했고, 자신이 몸살로 누웠다가도 저녁이면 빨래를 걷었다. 남편의 부모를 모시던 시절에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결혼하고 마흔여섯 해 동안 그녀가 아침을 거른 날은 거의 없었다. 밥솥의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오늘은 남편 몫의 밥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날도, 바로 그날이었다.

남편은 사흘 전 새벽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여든을 한 해 앞두고 있었다. 폐렴이 심해졌고, 오래 앓던 심장도 끝내 버티지 못했다. 마지막에 그는 산소마스크 아래로 무슨 말을 하려 했다.

“서…… 랍…… 두…….”

순자는 그 말을 ‘사랑해’로 알아들었다. 평생 듣지 못했던 말을 끝에 와서야 하려는가 싶어, 그의 마른 손을 꼭 쥐고 대답했다.

“알아요. 나도 알아요.”

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순자는 그 움직임을 죽기 직전의 몸짓으로 여겼다. 무슨 말을 남기려 했는지는 더 물을 수 없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아들 민수는 부고를 돌리고 조의금을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며느리 지영은 친척들 앞에서 순자의 어깨를 감싸며 “어머니는 이제 저희가 모실게요”라고 말했다. 순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고 해야 할지, 자신이 이미 누군가의 짐이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발인을 마친 저녁, 민수는 식탁에 서류봉투를 올려놓았다. 아직 향 냄새가 순자의 옷에 배어 있을 때였다.

“엄마, 집 명의부터 정리하자. 나중에 절차 복잡해지기 전에.”

“이 집을?”

“엄마 혼자 관리하기 어렵잖아. 내 앞으로 해두면 편해.”

순자는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앞의 물잔에는 아직 입도 대지 않은 물이 담겨 있었다.

“며칠만 있다가 하자. 네 아버지 사진이라도 치우고.”

민수는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늘 일을 미뤄. 아버지가 왜 답답해했는지 알겠다.”

순자는 대꾸하지 못했다. 남편도 자주 그렇게 말했다. 당신은 몰라, 내가 알아서 할게. 돈 이야기를 꺼내면 여자들은 쓸데없는 걱정부터 한다고 했다. 그녀가 그 말을 믿어서 침묵한 날도 있었고, 싸울 힘이 없어서 침묵한 날도 있었다. 어느 쪽이었는지 이제는 구별하기 어려웠다.

문 앞에 선 여자는 자기 이름이 최미영이라고 했다. 작은 세탁소를 운영한다고 했다. 순자는 여자를 안으로 들이지 않은 채 물었다.

“우리 남편하고 무슨 사이예요?”

“그렇게 물으실 줄 알았습니다.”

“서른 해가 넘게 돈을 받았다면서요. 내가 다른 걸 먼저 물어봐야 합니까?”

미영은 잠깐 눈을 감았다. 순자는 그 얼굴에서 변명을 찾으려 했지만, 미영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저는 그분의 여자가 아닙니다. 제 아버지가 그분이 몰던 트럭에 치여 돌아가셨어요.”

복도에서 누군가 엘리베이터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가 올라왔다 내려가는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1989년 11월 18일 새벽이었습니다. 성북동 고갯길에 비가 많이 왔어요.”

그 말을 듣자 순자는 오래전에 접어둔 한 달을 떠올렸다. 그해 겨울이 오기 전, 남편은 허리를 다쳤다며 일을 쉬었다. 잠이 들었다가도 땀에 젖어 깼고, 순자가 병원에 함께 가자고 하면 성을 냈다. 그 무렵부터 술병이 식탁 위에 자주 올라왔다. 순자는 사업이 어려워 그런 줄 알았다. 더 묻는다고 대답할 사람이 아니었다.

미영의 아버지는 새벽 신문을 돌리고 자전거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탈길에서 트럭이 미끄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진 뒤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다. 미영은 그때 열일곱 살이었다. 아픈 어머니와 어린 동생 둘이 남았다. 보험금이 나왔고 법적인 절차도 끝났지만, 집에서 아버지가 맡던 자리까지 메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분이 오시면 어머니가 문도 안 열어주셨어요. 어떤 날은 소금을 뿌렸고요. 그래도 다음 달이면 쌀을 놓고 가셨습니다. 봉투도요.”

“그래서 계속 받았어요?”

“받을 수밖에 없는 때가 있었어요.”

미영의 대답은 작았지만 흐리지 않았다. 순자는 그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죽은 사람의 가족이 받은 돈을 두고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렇다고 자기 집에서 벌어진 일까지 덜 아파지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은 민수 학원비를 내던 날마다 돈이 빠듯하다고 했다. 순자가 겨울 외투를 만지작거리면 작년 것도 멀쩡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녀는 시장 생선가게에서 하루 종일 찬물에 손을 담갔고, 밤에는 집에서 단추를 달았다. 손끝이 갈라지면 반창고를 붙이고 다시 실을 꿰었다. 그 돈이 적어도 자신들의 살림을 버티게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 돈…… 우리 애가 먹을 돈이었어요.”

말하고 나서 순자는 미영을 보았다. 미영 역시 누군가의 애였다. 어른이 되어 버린 아이가 서류봉투를 안고 자기 앞에 서 있었다. 순자는 그 사실 때문에 화를 거두지 않았다. 다만 화가 향해야 할 사람이 이미 사진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영은 봉투에서 공책 두 권과 작은 열쇠도 꺼냈다. 공책에는 남편이 미영네 집에 놓고 간 돈과 물건이 날짜별로 적혀 있었다. 뒷장으로 갈수록 글씨를 쓴 사람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미영의 어머니가, 그다음에는 미영이 적은 것이었다. 순자는 한 장도 넘겨 보지 못했다.

“이 돈은 저희가 돌려드리는 돈이 아니에요. 선생님 남편분이 따로 모으신 돈입니다.”

통장 사본에는 1990년부터 이어진 입금 내역이 있었다. 처음에는 7만 원이었다. 어떤 해에는 10만 원, 형편이 나아진 뒤에는 30만 원과 50만 원. 같은 달의 같은 날짜가 길게 이어졌다. 남편은 미영네에 돈을 가져다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순자에게 남길 돈도 모으고 있었다.

순자는 표지 안쪽의 자기 이름을 손끝으로 만졌다.

“내가 모르는 통장에 내 이름이 왜 있어요?”

“예금은 남편분 이름으로 되어 있어요. 선생님께 남긴다는 서류가 따로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그동안 모은 내역을 보여드리려고 만든 사본이고요. 원본은 맡겨두셨대요.”

미영은 열쇠를 내밀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부탁하셨어요. 말로 할 용기가 없으니 이걸 전해달라고요. 집 책상, 두 번째 서랍이라고 하셨습니다.”

순자는 열쇠를 받았다. 작고 차가운 것이 손바닥 한가운데 놓였다.

서랍 둘.

중환자실에서 남편이 하려던 말이었다.

순자는 그제야 미영을 집 안으로 들였다. 그녀를 믿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혼자서는 그 서랍을 열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안방의 책상은 남편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았다. 첫 번째 서랍에는 영수증과 볼펜, 멈춘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두 번째 서랍만 잠겨 있었다. 순자가 열쇠를 넣고 돌리자 오래 열리지 않은 서랍이 낮게 삐걱거렸다.

안에는 카세트테이프 열두 개와 두꺼운 대학노트, 집문서 봉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테이프마다 남편의 글씨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순자에게 1’, ‘순자에게 2’. 마지막 것에는 ‘내가 먼저 가면’이라고 쓰여 있었다.

순자는 거실 장식장 아래에서 낡은 카세트 라디오를 꺼냈다. 버리자고 할 때마다 남편은 아직 쓸 만하다며 막았다. 켜보니 한쪽 스피커에서만 소리가 났다. 버튼을 누르자 잠시 잡음이 흐르고, 죽은 사람의 숨소리가 들렸다.

“순자 씨.”

그 두 글자에 순자는 라디오를 바라보았다. 남편은 평생 그녀를 ‘여보’라고 불렀다. 집에서는 엄마라고도 했다. 자신의 이름이 그의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일이 이렇게 어색할 줄은 몰랐다.

“이걸 듣고 있다면, 내가 끝내 입으로는 말을 못 했다는 거겠지.”

남편은 사고를 숨긴 일을 고백했다. 그날 그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전날부터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일을 한 번 더 맡으면 생활비를 보탤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무리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사고 뒤에는 조사를 받고 유족과 합의했으며, 법원에서 선고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책임을 집에 돌아와 말하는 일은 피했다.

“네가 떠날까 봐 겁났어. 민수가 나를 어떤 아버지로 볼지도 무서웠고.”

순자는 테이프가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둥근 창 안에서 검은 띠가 한쪽으로 감겼다. 남편은 미영네에 찾아가 사과했다는 이야기, 그 집 아이들의 학비를 보탰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한참 말을 멈췄다.

“그 집에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정작 당신한테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못 했어.”

순자는 시장에서 일하고 돌아와 저녁상을 차리던 날들을 떠올렸다. 손이 얼어 실을 잡기 어려운 밤에도 단추를 달았고, 시부모가 아프면 병원에 모시고 갔다. 아들의 운동화를 말려 다음 날 학교에 보냈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살림이 저절로 굴러간다고 생각한 듯했다.

테이프 속에서 남편이 말했다.

“나는 남의 집 가장을 빼앗아 놓고 내 집 가장 노릇도 제대로 못 했다. 당신이 벌어온 돈으로 민수 학원비를 내고 내 술값까지 막았는데, 내가 당신을 먹여 살리는 줄 알았어.”

그는 오래전부터 순자의 몫이라 여기며 조금씩 예금을 모았다고 했다. 통장에 적힌 ‘월급’은 그가 이제야 붙인 이름이었다. 순자는 그 말을 듣고 기쁘지 않았다. 한 번도 자신에게 묻지 않고 정한 금액이었다. 필요한 날에는 쥐여주지 않았던 돈이기도 했다.

“그렇게 잘 알았으면…….”

순자는 녹음기 앞에서 중얼거렸다.

“내가 아팠을 때 죽 한 그릇 끓여주지. 추운 날 외투 하나 사주지.”

미영은 식탁에서 물을 따르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순자는 그 여자를 향해 말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미영뿐이었다. 남편은 여전히 혼자 말하고 있었다. 죽고 나서까지 자기 말이 끝날 때까지 들어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순자는 정지 버튼을 눌렀다.

“오늘은 여기까지 들을래요.”

미영은 물잔을 순자 쪽으로 밀었다. 순자는 한 모금 마셨다. 컵이 입술에 닿을 때 이가 조금 떨렸다.

미영이 돌아가려 할 때 순자가 물었다.

“당신은 그 사람을 용서했어요?”

미영은 현관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아니요. 어떤 날은 아직도 아버지가 보고 싶어요. 다만 그 사람을 미워하는 데 제 남은 시간을 다 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말이 순자에게는 위로도, 명령도 아니어서 좋았다. 순자는 복도 끝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서 있었다.

그날 저녁 민수가 다시 찾아왔다. 식탁 위에 펼쳐진 사본을 보자, 그가 먼저 물었다.

“이게 뭐야? 1억 8천?”

순자가 대답하기 전에 민수는 통장을 집어 들고 잔액부터 확인했다.

“아버지한테 이런 돈이 있었어? 왜 우리한테 말 안 했지?”

순자는 ‘우리’에 자신이 들어 있는지 잠깐 생각했다.

“나한테 남긴 돈이래.”

“엄마 이름만 적어둔 거겠지. 아버지 돈이면 상속받을 권리는 나한테도 있어.”

“네 아버지는 이걸 내 월급이라고 썼다.”

민수가 웃었다. 별 뜻 없이 새어 나온 웃음이어서 순자는 더 선명하게 들었다.

“집에서 밥하고 애 키운 게 무슨 월급이야? 엄마도 그 집에서 같이 살았잖아.”

순자는 자기가 나이 든 여자라는 사실을 그때 갑자기 느꼈다. 아이였던 민수의 볼을 닦아주던 손으로, 민수가 들고 있던 통장을 다시 받았다. 아들이 그 말을 할 만큼 컸다는 것이, 그 말을 어디에서 배웠는지가 모두 떠올랐다.

민수는 서류를 펼쳐놓고 서명을 재촉했다. 어제는 집 명의를 정리하는 데 필요한 절차라고만 했다. 순자가 작은 글씨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으니 아파트의 지분을 아들에게 넘기는 증여계약서였다. 위임장도 있었다.

“어차피 나중에 내 거 될 집이잖아.”

“나중은 나중이고, 지금은 내가 사는 집이다.”

민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엄마 혼자 얼마나 산다고 이렇게 큰 집이 필요해?”

자기가 한 말을 민수도 들은 듯했다. 잠깐 순자를 보더니 시선을 서류로 내렸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순자는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민수가 뭘 하느냐고 묻는 사이, 접힌 선을 따라 찢었다. 다시 접어서 한 번 더 찢었다. 손가락이 떨려 종이 끝이 고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다, 얼마나 더 살지.”

조각난 종이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순자가 말했다.

“그러니까 남은 날은 내가 정할게.”

민수는 며느리가 모시자고 한 것을 자신이 설득했다느니, 이렇게 나오면 앞으로 돌보기 어렵다느니 하는 말을 쏟아냈다. 순자는 듣고 있다가 짧게 대답했다.

“그럼 모시지 마라.”

현관문이 닫힌 뒤, 순자는 식탁에 오래 앉아 있었다. 조금 전에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혼자 남으니 무서웠다. 다음에 병원에 갈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 연락할지, 민수가 정말 다시는 오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했다. 모르는 서류를 찢었다고 앞으로의 외로움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밤에는 울었다. 남편 때문에 울다가 민수 때문에 울었고, 자신이 무서워하는 것을 들킬 사람이 없어서 또 울었다.

아침이 되자 배가 고팠다. 순자는 습관대로 쌀을 씻으려다 손을 멈췄다. 남편이 좋아하던 된장찌개도, 민수가 오면 만들어주던 달걀말이도 오늘은 필요 없었다. 식빵 한 장을 구워 사과 반쪽과 접시에 올리고 커피를 내렸다. 세 사람의 그릇을 놓던 식탁에 한 사람의 접시만 있었다.

순자는 그것을 다 먹었다. 누구에게도 덜어주지 않고, 급히 일어나 뒷정리를 하지도 않았다.

며칠 뒤 순자는 남편이 서류를 맡겨둔 법무사를 찾아갔다. 서랍에서 나온 집문서와 예금 내역을 한 장씩 펼쳐놓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다시 물었다. 예금은 남편이 순자에게 남기도록 정리해둔 것이었지만 절차를 거쳐야 했고, 집에도 순자 이름의 지분이 있었다. 아들과 의견이 다를 수 있다는 설명도 들었다. 순자는 한 문장을 들으면 적고, 모르면 또 물었다.

그동안 남편은 돈에 관해 묻는 순자를 답답해했다. 민수도 비슷했다. 법무사는 같은 질문을 두 번 받아도 종이를 돌려 보여주며 다시 설명했다. 순자는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메모지를 꺼내 읽었다. 모르는 것을 묻는 데는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날 밤, 순자는 마지막 테이프를 틀었다.

“순자 씨. 내가 먼저 가면 민수가 집을 달라고 할 거야.”

남편의 목소리에는 오래 망설인 흔적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어. 집과 돈은 결국 아들 몫이고, 당신은 우리가 돌봐야 할 사람이라고. 내가 당신을 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으니까 그 애도 그렇게 배운 거야.”

순자는 라디오를 끌 뻔했다. 죽은 뒤에도 남편이 아들을 두둔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말은 달랐다.

“그래도 집은 주지 마. 불쌍해서 주지도 말고, 무서워서 주지도 마. 민수가 당신을 한 사람으로 대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끝내 그러지 못하면 안 줘도 돼.”

테이프에서 잡음이 흘렀다. 남편은 숨을 고른 뒤 미영의 가족을 자신 대신 용서할 필요도, 만나야 할 의무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한참을 더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내가 모아둔 돈으로 민수 가게를 차려주지 마. 손주 유학을 보내려고도 하지 말고, 내 제사를 크게 지내지도 마. 당신이 먹고 싶은 걸 먹고, 보고 싶은 걸 보고, 배우고 싶었던 걸 배워.”

순자는 그 말이 고마우면서도 화가 났다. 이런 허락조차 남편의 목소리로 들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살아 있을 때 그녀가 냉면 한 그릇 먹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는 찬 음식을 왜 먹느냐며 들어주지 않았다. 원하는 것이 사소할수록 순자는 다시 말하기를 그만두었다.

남편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김순자 씨. 당신은 내 아내이기 전에 김순자였어.”

테이프가 끝나고도 순자는 한동안 앉아 있었다. 라디오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영정사진 속 남편은 살아 있을 때처럼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그걸 알았으면 살아 있을 때 불러주지.”

순자는 사진을 향해 말했다.

“내가 다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돈 모아뒀다고 그동안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야.”

그녀는 사진을 치우지 않았다. 대신 빈 컵을 가져와 옆에 앉았다. 오늘은 그에게 화를 내고 싶었고, 내일은 그가 보고 싶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순자는 자기 마음을 서둘러 정리하지 않기로 했다.

남편의 사십구재에는 친척들이 권한 큰 상을 차리지 않았다. 막걸리 한 잔과 두부김치를 놓고, 순자가 좋아하는 딸기도 한 접시 씻어 올렸다. 남편이 그 딸기를 보면 뭐라고 했을까. 순자는 잠시 생각하다가 하나를 집어 먹었다.

민수는 오지 않았다. 오후에 현관 앞에 국화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미영이 두고 간 꽃이었다. 작은 카드에는 ‘남은 날은 선생님 것으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순자는 꽃을 물병에 꽂았다. 고맙다는 연락은 그날 하지 못했다. 미영도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순자는 집을 팔지 않았다. 아들에게 넘기지도 않았다. 예금의 일부는 병원비와 생활비를 위해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정리했다. 서류에 서명하기 전에는 꼭 집으로 가져와 다시 읽었다. 누군가 옆에서 얼른 끝내자고 해도 하루 더 생각했다.

그러고는 주민센터의 사진 수업에 등록했다.

첫날 강사는 휴대전화로 자기 얼굴을 찍어보자고 했다. 순자는 실수로 화면을 너무 가까이 당겼다. 눈가의 잔주름과 볼의 작은 점이 먼저 보였다. 사진을 지우려는데 강사가 창가 쪽으로 와보라고 했다.

“거기는 빛이 예쁘게 들어와요.”

순자는 창 앞에서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화면 속 여자는 조금 지쳐 보였다. 그렇지만 눈을 피하지 않고 렌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진을 찍는 동안 누구에게도 예쁘게 나와야 할 이유가 없었다. 순자는 처음 찍은 사진도, 두 번째 사진도 지우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혼자 냉면집에 들어갔다. 남편은 찬 음식을 싫어해 그 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그냥 걸음을 재촉했다. 순자는 물냉면을 시켜 식초를 두 바퀴 두르고 겨자를 조금 풀었다. 육수는 이가 시릴 만큼 차가웠다. 첫 젓가락을 삼키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순자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휴지를 한 장 뽑았다. 마음이 편해져서 우는 것인지, 아직 슬픔이 남아서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면이 불기 전에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석 달쯤 지나 민수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잘 지내?”

순자는 창틀에 걸어둔 사진 한 장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조금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였다.

“응. 사진 배우고 있다. 다음 달엔 수업 사람들하고 경주에도 가.”

민수는 순자가 혼자 여행을 간다는 것부터 놀라워했다. 몇 마디 안부가 오간 뒤, 그는 가게 사정이 어렵다고 했다. 새 보증금이 필요하고 잠시만 빌려주면 꼭 갚겠다고 했다.

“얼마가 필요한데?”

“오천만 원.”

순자는 전화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들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동시에 그 전화가 온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사업 계획이랑 지금 빚진 내역을 가져와라. 상담할 사람하고 같이 보고 이야기하자.”

“엄마, 아들이 돈 좀 빌려달라는데 무슨 서류까지 내?”

“오천만 원은 ‘좀’이 아니야.”

“아버지가 남긴 돈이잖아.”

“내게 남긴 돈이다.”

민수는 엄마가 변했다고 했다. 순자는 부엌에 서서 식탁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 남편 사진이 놓여 있던 자리에 자기 사진 한 장이 있었다.

“그래. 조금 변했어.”

전화를 끊은 뒤에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래도 그날 밤은 잠을 잤다.

일주일 뒤 민수가 서류를 들고 왔다. 순자는 차를 내어주고, 아들이 앉은 자리에서 한 장씩 읽었다. 빚은 오천만 원이 아니었다. 이미 1억 원을 넘겼고, 새 가게 계획도 아직 희미했다. 순자는 돈을 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 폐업 상담에 함께 가고 채무를 어떻게 정리할지 알아보자고 했다.

민수는 처음에는 화를 냈다. 순자는 듣고 있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다시 말했다. 그 일을 몇 번 반복해야 했다. 아들이 가게를 접고 다시 일을 구하는 동안, 순자도 사진 수업에 나갔다. 둘은 자주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이 없을 때마다 마음이 쓰였지만 먼저 돈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어느 저녁 민수가 반찬통을 들고 왔다. 지영이 처음 담근 장아찌라고 했다. 민수는 통을 건네고도 문턱을 넘지 못했다.

“엄마. 그날 내가 얼마나 더 살 거냐고 한 말…… 미안해.”

순자는 통을 받아 식탁에 올려두었다.

“많이 아팠다.”

“알아.”

“지금 미안하다고 해서 그 말을 못 들은 게 되진 않아.”

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같으면 순자가 먼저 괜찮다고 했을 것이다. 아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는 게 싫어서였다. 이번에는 그 침묵을 그대로 두었다.

“앞으로는 다르게 해볼게.”

순자는 그제야 문을 더 열었다.

“밥은 먹었니?”

“아직.”

“그럼 네 밥은 네가 퍼라. 나는 장아찌 꺼낼게.”

민수는 작게 웃고 부엌으로 갔다. 두 사람은 늦은 저녁을 함께 먹었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민수가 밥그릇을 씻는 동안 순자는 젖은 행주를 식탁에 펼쳤다. 서로 어색한 채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일 년 뒤 순자는 사진 수업 동료들과 주민센터 작은 전시실을 빌렸다. 순자가 낸 사진에는 빈 식탁에 아침 볕이 드는 모습, 냉면 그릇 가장자리에 맺힌 물방울, 손때 묻은 카세트테이프가 있었다. 마지막 사진은 현관 앞에 놓인 자신의 운동화 한 켤레였다. 신발끈 한쪽이 살짝 풀려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순자가 직접 제목을 적었다.

‘내가 나가는 문.’

미영도 전시회에 왔다. 두 사람은 가끔 차를 마셨지만 자주 보지는 않았다. 순자는 미영을 만나면 오래전 사고를 잊을 수 없었고, 미영에게도 순자의 집은 쉬운 장소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처음 우리 집에 왔던 날, 내가 문을 닫았으면 어쩌려고 했어요?”

미영은 순자의 사진 앞에 서서 대답했다.

“다음 날 다시 와봤을 거예요. 그래도 안 되면 그만뒀겠죠. 선생님이 듣고 싶지 않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순자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뒤늦게 전해진 진실을 듣고 무엇을 할지는, 이제 듣는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전시가 끝나고 순자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남편 생각이 났다. 어떤 날에는 그가 손님 없는 날 사 온 붕어빵이 떠올랐고, 어떤 날에는 잠든 자신을 깨워 물 한 잔 가져오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가 남긴 돈을 고맙게 여기는 마음과, 그에게 화가 나는 마음은 번갈아 오지 않았다. 대개는 함께 있었다.

순자는 아직 남편을 용서했는지 몰랐다. 모른다는 대답을 당분간 그대로 두기로 했다. 민수와도 일요일마다 만날지는 정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주에는 사진 수업 친구들과 봄꽃을 찍으러 가기로 했다.

현관 앞에서 순자는 운동화 끈을 다시 묶었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는 집이었다. 하지만 창가에는 아침에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고, 식탁에는 자신이 읽다 접어둔 책이 있었다. 저녁으로는 아까부터 먹고 싶었던 냉면을 시킬 생각이었다.

순자는 열쇠를 꺼내기 전에 휴대전화를 들었다. 화면에 비친 얼굴을 보고 잠시 웃었다. 사진 수업 첫날보다 카메라를 조금 멀리 들 줄 알게 된 얼굴이었다.

“김순자.”

작게 불러보니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의 이름 같았다. 순자는 현관문을 열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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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eoula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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