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해줬어”라는 남편의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맞벌이하며 두 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주부입니다. 지금 둘째를 임신 중이고, 출산 예정일은 석 달 정도 남았습니다.
저희는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지만, 임신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그 10분도 짧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아침에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출근합니다. 아이가 요즘 신발을 혼자 신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해서, 현관 앞에서 양말 하나 신기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이거 말고 파란 양말.”
“이건 어제 신었잖아.”
“싫어. 파란 거.”
아이는 울먹이고, 저는 허리를 제대로 굽히지 못해 바닥에 주저앉지도 못합니다. 남편은 현관문을 열어둔 채 시계를 봅니다.
“여보, 나 먼저 내려가서 차 뺄까?”
그 말을 들으면 괜히 화가 나다가도, 남편 출근 시간이 빠듯한 걸 알아서 아무 말 없이 아이 양말을 다시 찾아줍니다.
남편이 아이 가방을 들고 먼저 엘리베이터를 잡아두면, 저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제 배를 받친 채 뛰다시피 내려갑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에 겨우 올라타는 날도 많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해 퇴근한 뒤, 다시 아이를 데려옵니다. 집에 돌아오면 아이는 하루 종일 참았던 말을 한꺼번에 쏟아냅니다.
“엄마, 오늘 미끄럼틀 탔어.”
“선생님이 스티커 줬어.”
“아빠는?”
아이에게 대답하면서 저녁을 차리고, 어린이집 알림장을 확인하고, 씻기고, 다음 날 입힐 옷을 준비합니다.
특별히 불행한 생활은 아닙니다. 남편도 육아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아닙니다. 퇴근이 빠른 날에는 아이를 목욕시키고, 주말에는 제가 한 시간이라도 쉬라고 아이를 데리고 나갑니다.
다만 요즘은 무엇을 하든 시간이 부족하고, 돈을 쓸 때마다 한 번 더 계산하게 됩니다.
전세대출 이자와 관리비, 어린이집 비용, 보험료, 통신비가 매달 자동이체로 빠져나갑니다. 카드 명세서에는 기저귀와 물티슈, 배달비, 병원비가 줄줄이 찍혀 있습니다.
둘째가 태어나면 제가 일을 쉬게 될 수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육아휴직을 쓸 수는 있지만, 지금 받는 월급이 그대로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출산 준비물과 산후조리원 비용도 남아 있고, 첫째가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병원비가 또 생깁니다.
그래서 요즘은 마트에서 장을 볼 때도 예전처럼 쉽게 카트에 담지 못합니다.
아이에게 먹일 과일은 사야 하지만, 딸기 한 팩 가격을 보고 망설입니다. 기저귀를 살 때는 온라인 최저가를 비교하고, 배송비를 아끼려고 필요한 물건을 한꺼번에 주문합니다.
그렇다고 남편의 돈을 통제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저희 부부는 결혼 초부터 각자 쓰는 돈에 대해서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공동 생활비와 저축, 대출 이자처럼 함께 책임져야 하는 돈은 같이 부담하고, 그 외의 돈은 각자 어느 정도 자유롭게 쓰기로 했습니다.
남편이 친구를 만나 밥을 사거나, 운동화를 사거나,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것을 하나하나 묻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제 돈으로 친정에 선물을 보내거나 친구를 만나는 일을 남편에게 허락받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양가 가족에게 돈을 보내거나, 큰 금액의 선물을 할 때는 서로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엄마 생신이라 30만 원 보내려고 해.”
“동생이 요즘 힘들다니까 이번 달에 조금 도와주고 싶어.”
그 정도는 허락이 아니라 공유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연애하는 사이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며 앞으로의 생활을 함께 책임져야 하는 부부니까요.
남편에게는 세 살 어린 여동생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수진이라고 하겠습니다.
수진이는 스무 살 무렵부터 서울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행사나 공연 쪽 일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지역 축제나 기업 행사에 나가기도 하고, 가끔 작은 무대에 서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일이 있는 달에는 바쁘지만, 일이 없는 달에는 수입이 일정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월세와 교통비를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는 말도 남편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와 수진이의 사이는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도 아닙니다.
명절에 만나면 안부를 묻고, 아이 사진을 보여주면 “많이 컸다”고 말하는 정도입니다. 따로 자주 연락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수진이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서로 각자의 생활이 바빴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가끔 동생 이야기를 했습니다.
“수진이 이번 달에는 일이 거의 없었대.”
“다음 주에 지방 행사 간다더라.”
“요즘 허리가 아프다는데 병원은 안 갔대.”
저는 그때마다 남편의 말을 듣고 대답했습니다.
“혼자 사는데 힘들겠다.”
“그래도 아프면 병원은 가야지.”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평일 저녁이었습니다.
그날은 회사에서 회의가 길어져 평소보다 늦게 퇴근했습니다. 집에 오니 저녁 8시가 가까워져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뒤 집까지 걷는데 배가 몇 번 단단하게 뭉쳤습니다. 잠깐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어린이집 하원은 남편이 맡고 있어 아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현관문을 열자 아이가 바로 달려왔습니다.
“엄마!”
아이는 제 다리에 매달렸습니다.
“엄마 안아.”
저는 가방도 내려놓지 못한 채 아이를 안았습니다. 배가 불러 오래 안아주기는 힘들었지만, 아이는 제 목을 끌어안고 한참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주방에서 국을 데우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미역국 데워놨어. 계란말이도 사 왔어.”
“고마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는 속으로 미안했습니다. 요즘 제가 퇴근하고 저녁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이 식판을 꺼내고, 저는 밥을 퍼 담았습니다. 아이는 밥을 두 숟가락 먹더니 반찬을 손으로 만지작거렸습니다.
“이거 안 먹어.”
“한 입만 먹어보자.”
“싫어.”
남편이 아이 앞에 계란말이를 밀어주며 말했습니다.
“그럼 계란말이 하나 먹고, 밥 두 숟가락 먹자.”
아이와 실랑이를 하던 중 남편이 갑자기 말했습니다.
“이번 주가 수진이 생일이더라.”
“그래?”
“뭘 좀 해줄까 하다가 그냥 안 해줬어.”
저는 국을 한 숟가락 뜨다가 남편을 바라봤습니다.
“생일인데? 전화라도 해.”
“응. 뭐, 그러려고.”
남편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특별히 묻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동생에게 선물을 하든, 전화를 하든, 그것이 제게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번에는 안 챙기나 보다’ 하고 넘겼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토요일 오후에 일이 생겼습니다.
그날 오전에는 아이를 데리고 근처 놀이터에 다녀왔습니다. 아이는 미끄럼틀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제 손을 잡아달라고 했고, 내려온 뒤에는 또 올라가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남편은 아이가 미끄럼틀을 타는 모습을 휴대전화로 찍었습니다.
“아빠한테 보여줘. 하나, 둘, 셋!”
아이가 미끄럼틀 아래로 내려오며 웃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뒤 아이는 낮잠을 자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저는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고, 남편은 거실 바닥에 앉아 아이와 블록을 쌓고 있었습니다.
저는 휴대전화를 찾다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아까 찍은 사진 나한테 보내줘. 엄마한테도 보내려고.”
남편은 아이에게 블록을 건네며 휴대전화를 제 쪽으로 밀었습니다.
“잠금 풀려 있어. 사진 골라서 보내줘. 나는 애 씻길게.”
남편은 아이를 욕실로 데려갔습니다. 저는 사진첩을 열어 아이 사진을 고르고 카카오톡을 켰습니다.
제 대화방을 찾으려고 목록을 내리다가 수진이 이름을 봤습니다.
대화방 위에 표시된 날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달 전.
수진이 생일날이었습니다.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습니다.
‘그냥 생일 축하한다고 한 건가?’
그런데 그때 남편이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뭘 좀 해줄까 하다가 그냥 안 해줬어.”
저는 손가락을 화면 위에 올려둔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보지 않는 게 맞다는 생각과,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결국 대화방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짧은 메시지만 보였습니다.
“생일 축하한다.”
그 아래에 선물 내역이 있었습니다.
백화점 상품권 50만 원.
저는 화면을 한 번 닫았다가 다시 열었습니다. 혹시 제가 금액을 잘못 본 것은 아닌지 확인했습니다.
상품권 금액은 50만 원이 맞았습니다.
수진이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오빠 고마워. 잘 쓸게.”
그게 전부였습니다.
욕실에서는 아이가 물을 튀기며 웃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그러지 마, 눈에 들어가”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거실에 앉은 채 화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금액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50만 원이면 이번 달 장보기 비용의 상당 부분입니다. 어린이집 특별활동비와 아이 병원비를 합쳐도 적지 않은 돈입니다. 출산 준비물을 몇 가지 더 살 수 있고, 산후조리원 비용으로 따로 떼어둘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는 금액보다 다른 생각이 앞섰습니다.
‘왜 아무것도 안 해줬다고 했을까?’
남편이 동생에게 50만 원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 화가 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진이가 혼자 살고 있고, 일이 불안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남편이 마음을 쓰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남편이 처음부터 말했다면 저도 놀라기는 했겠지만 대화를 했을 것입니다.
“50만 원은 조금 큰 금액이네.”
“이번에는 알겠는데, 다음에는 미리 말해줘.”
그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무것도 안 해줬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이번 한 번일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런 생각이 따라왔습니다.
‘혹시 전에도 보낸 적이 있을까?’
‘내가 모르는 돈이 더 있을까?’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까?’
남편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으면 누구와 연락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수진이 이야기가 나오면 저도 모르게 긴장했습니다. 택배가 도착해도 혹시 또 동생에게 보낼 물건인가 싶었습니다.
저는 그런 제가 싫었습니다.
남편을 감시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숨겨진 사실을 알고 나니, 이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며칠을 더 지나고, 어느 날 밤 결국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습니다. 안방에서는 가습기가 작게 돌아가고 있었고, 거실에는 설거지하지 않은 아이 컵 하나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남편은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로 영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주방에서 물을 마신 뒤 식탁에 앉았습니다.
바로 말하지 못하고 한동안 컵만 만지작거렸습니다.
남편이 먼저 물었습니다.
“왜? 무슨 일 있어?”
저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 수진이 생일에 정말 아무것도 안 해줬어?”
남편의 표정이 굳었습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당신이 아무것도 안 해줬다고 했잖아.”
“그랬나?”
“그런데 상품권 보냈더라.”
남편은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더니 제 말을 되묻듯 말했습니다.
“내 휴대전화 봤어?”
그 순간 저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진 보내려고 열었다가 대화방이 보였어. 그 뒤에 확인한 건 미안해. 내가 휴대전화를 본 건 잘못한 거 알아.”
남편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습니다.
저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해줬다고 말했는지 묻는 거야.”
남편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내 돈으로 내 동생한테 선물한 건데, 꼭 말해야 해?”
그 말이 생각보다 아팠습니다.
물론 남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습니다. 저희가 각자 일정 부분 자유롭게 쓰기로 한 돈이었고, 남편이 동생에게 선물한 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떠나, 남편이 저를 대화 상대가 아니라 간섭하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 같아 서운했습니다.
“내가 선물하지 말라고 했어?”
“그런 뜻은 아니잖아.”
“그럼 왜 숨겼어?”
남편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수진이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내가 언제 싫다고 했어?”
“그냥… 별로 관심도 없잖아.”
그 말에 웃음이 나올 뻔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였습니다.
“관심이 없는 것과 싫어하는 건 다르지. 나도 당신 동생이 매달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까지 다 알고 지낼 수는 없어. 그렇다고 당신이 동생한테 선물하는 걸 싫어한다고 말한 적은 없잖아.”
남편은 한동안 가만히 있었습니다.
“거짓말한 건 아니야. 그냥 굳이 말 안 한 거지.”
저는 그 말을 듣고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아무것도 안 해줬다고 말했잖아. 그게 어떻게 그냥 말 안 한 거야?”
“그렇게까지 따질 일이야?”
“당신한테는 별일 아닐 수 있지. 그런데 나는 돈보다 그 말이 더 싫어.”
남편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50만 원 보낸 게 그렇게 큰 문제야?”
“우리 집에서 50만 원이 작은 돈은 아니잖아.”
저는 배 위에 손을 얹었습니다.
“나 곧 일을 쉬어야 할 수도 있어. 출산하고 나면 지금처럼 월급이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고, 둘째 병원비도 생길 거야. 첫째 어린이집 비용도 계속 나가고, 생활비도 줄어들 텐데, 그런 상황에서 가족에게 50만 원을 보냈으면 최소한 알고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남편은 말없이 식탁 위를 바라봤습니다.
저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동생한테 돈 쓰는 걸 막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런데 우리 집 돈이 어디로 나가는지 서로 알고 있어야 하지 않아? 내가 친정에 50만 원을 보냈는데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당신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아?”
남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한참 뒤에야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수진이가 요즘 일이 없대.”
“그건 알고 있어.”
“월세도 밀릴 뻔했다고 하더라. 이번 달에는 행사도 취소됐고.”
남편은 말을 하다 멈췄습니다. 그제야 왜 상품권을 보냈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수진이가 남편에게 직접 돈을 달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남편은 동생이 힘든 상황에 놓였다는 말을 듣고, 자신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남편이 다시 말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내가 수진이를 많이 챙겼어. 부모님도 나한테 수진이 좀 봐주라고 했고. 수진이는 혼자 올라와서 계속 고생했잖아. 나라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
저는 남편을 바라봤습니다.
그 마음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동생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책임감을 느껴온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 마음은 이해해. 수진이가 힘들면 도와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도 반대하지 않아.”
남편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다만 당신에게는 이제 아내와 아이들이 있잖아. 당신이 수진이를 걱정하는 것처럼, 나도 우리 집을 걱정해. 곧 둘째가 태어나고, 내가 일을 쉬게 될 수도 있어. 우리 집 형편을 생각하면서 도와야 하는 거잖아.”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싫어할 거라고 미리 생각한 것도 서운해. 내가 어떤 말을 할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숨긴 거잖아. 나는 당신 아내인데, 왜 나를 같이 의논할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한동안 거실에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냉장고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 윗집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가 차례로 들렸습니다.
남편은 소파에 기대앉은 채 손가락으로 휴대전화 모서리만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러다 말했습니다.
“미안해.”
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싫어할 것 같아서 말 안 한 건 맞아. 그런데 내가 괜히 그렇게 생각했어. 사실 말하면 또 설명해야 할 것 같고, 싸우기 싫어서 피한 것도 있어.”
“피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알아.”
“나는 당신 동생에게 돈을 보내지 말라고 한 적 없어.”
“알아.”
“그런데 당신이 ‘아무것도 안 해줬다’고 말한 건,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처럼 느껴졌어.”
남편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부터는 말할게.”
그날 저희는 처음으로 가족에게 쓰는 돈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각자 용돈으로 사는 커피나 옷, 친구와의 식사까지 서로 보고하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양가 부모님이나 형제자매에게 돈을 보내거나, 20만 원이 넘는 선물을 할 때는 미리 말하기로 했습니다.
액수가 작더라도 반복적으로 도와주는 경우에는 서로 상황을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한 번의 지출보다, 아무 말 없이 계속 돈을 보내는 상황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데에는 남편도 동의했습니다.
그 기준은 누가 누구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아이가 둘이 되고, 생활비가 달라지고, 한 사람이 일을 쉬게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서로 모르는 지출을 만들지 않기 위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날 대화를 끝낸 뒤 마음이 바로 편해진 것은 아닙니다.
남편이 미안하다고 했지만, 저는 며칠 동안 계속 생각했습니다.
‘내가 휴대전화를 보지 않았다면 그는 말했을까?’
‘이번이 정말 처음일까?’
‘앞으로도 또 숨길까?’
그런 생각을 하는 제가 싫었습니다. 남편의 행동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한 번 알게 된 사실은 쉽게 잊히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남편은 그 후 가족에게 돈을 보내거나 선물을 할 일이 있으면 먼저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수진이가 이번 달에도 일이 별로 없대. 다음 주에 10만 원 정도 보내도 될까?”
그 말을 들었을 때도 처음에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숨기지 않고 먼저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계산기를 두드려본 뒤 대답했습니다.
“이번 달에는 괜찮아. 대신 다음 달 카드값이랑 병원비도 있으니까 정기적으로 보내는 건 우리 상황을 보고 정하자.”
남편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일을 겪으며 수진이가 잘못한 것은 없다는 생각도 계속 했습니다. 수진이는 오빠가 보낸 상품권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 돈을 어떻게 받게 되었는지, 오빠가 아내에게 무엇이라고 말했는지까지 수진이가 책임질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수진이를 탓하고 싶지 않습니다.
문제는 남편과 저 사이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부부가 모든 돈을 허락받고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각자 자유롭게 쓸 돈도 필요하고, 가족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도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함께 아이를 키우고 생활비를 책임지는 사이라면, 배우자가 나중에 알았을 때 상처받을 만한 일은 먼저 이야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돈의 액수가 크고 작으냐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결국 마음에 남는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왜 나는 당신이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일까?’
‘왜 당신은 내가 무조건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남편이 동생을 챙긴 일보다, 저를 빼놓고 혼자 판단한 일이 더 서운했습니다.
남편에게 수진이가 가족인 것처럼, 저와 아이들도 남편의 가족입니다. 동생을 돕는 마음과 아내와 아이들을 배려하는 마음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둘 다 지키려면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지금도 저는 가끔 그날의 대화를 떠올립니다.
“아무것도 안 해줬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말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나니, 그 짧은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사람을 가장 크게 다치게 하는 것은 반드시 큰돈이나 큰 사건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작은 말 한마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거짓말 하나가 오히려 오래 남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남편이 가족을 챙기는 마음을 막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는 말해주었으면 합니다.
“이번에 수진이에게 이만큼 도와주고 싶어.”
“우리 형편에 괜찮을까?”
그 말을 들은 뒤 함께 판단하고 싶습니다. 설령 제가 걱정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동생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우리 집의 상황을 함께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남편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남편이 자기 돈으로 여동생에게 보낸 선물이니 넘어가셨을까요? 아니면 50만 원이라는 금액보다 “아무것도 안 해줬다”고 말한 이유를 먼저 물어보셨을까요?
부부 사이에서 가족에게 쓰는 돈은 어디까지 각자의 자유여야 할까요?
그리고 어느 정도부터는 반드시 상의해야 할까요?
제가 임신 중이라 예민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아이를 키우는 부부라면 충분히 짚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을까요?
저는 아직도 완벽한 정답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번 일을 통해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부부 사이의 신뢰는 큰 약속 하나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일들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신뢰가 흔들렸을 때는 모른 척 덮는 것보다, 서운하더라도 사실대로 말하고 함께 기준을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2026.08.26 방송 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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