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으로 남은 날
남편을 보내고 돌아온 다음 날, 김순자는 싱크대에 쌓인 종이컵을 씻고 있었다. 한 사람이 죽었는데도 집에는 씻을 것이 남았다. 손님들이 마시다 놓고 간 컵마다 커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순자는 수도꼭지를 틀어 컵을 하나씩 헹궜다. 물이 손등에 닿는 감각만 또렷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는데,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오전 열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현관문…
천장에 떠 있던 하얀 것
우리 가족 여섯 명이 낡은 호텔에서 본 것 아버지는 사람을 봤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목을 맨 사람의 그림자를 봤다고 했고요. 저는 하얀 타원 하나만 보았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형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대신 밤새 가슴이 눌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경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대들보의 흔적을 확인하고 나서야…
구더기가 기어 나온 지하 만화가게
책장 뒤에서 한 달 동안 썩고 있던 여자 “아저씨.”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짜장면이 숨을 쉬어요.” 성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아이는 젓가락을 든 채 굳어 있었다. 검은 짜장 소스 위에서 하얀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게 끊어진 면발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면이 아니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구더기 수십 마리가 서로의 몸을 밀어내며 그릇 밖으로 기어 나오고…
밤 12시마다 내가 잠든 사진이 도착했다
암막 커튼 뒤의 사람 낯선 방의 밤에는 사물들이 자기 목소리를 되찾는다. 낮에는 그저 가구였던 것들이 불이 꺼지면 기척이 되고, 아무 의미 없던 소음은 누군가의 움직임처럼 들린다. 냉장고의 모터가 낮게 떨리는 소리.수도관 안쪽에서 물이 넘어가는 소리.위층 사람이 슬리퍼를 끌며 걷는 소리.현관문 밖에서 발걸음이 멈췄다가 다시 멀어지는 소리. 처음 혼자 살기 시작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모든 소리를…